이별에 이르는 길
재회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별의 원인에 대해서 촉발 사건을 말한다. 연락 문제, 여사친 남사친 문제, 돈 문제, 미래 준비, 종교, 직장, 과거 연애사, 주변의 개입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런 사건들이 이별에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애를 행복하게 하는 커플들도 이런 과정 중에 갈등은 있지만 그 갈등을 잘 해결해 나간다. 이별의 실제 원인은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의 문제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가 이별의 원인이라면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연애하는 커플은 거의 없다. 모두 같은 문제를 겪기 때문이다. 같은 연락 문제를 두고도 어떤 커플은 조율하고, 어떤 커플은 서로의 인격을 의심하다 이별한다. 차이는 갈등의 내용보다 갈등에 대한 반응 방식에 있다.
싸울 것이냐, 도망갈 것이냐
신경 과학자 월터 캐논(Walter Cannon)은 교감신경 연구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갈등 상황에서 싸울 것이냐, 도망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투쟁-도피 반응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을 밝혔다.
투쟁-도피 반응은 위협 상황에서 몸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생리적 반응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면 도망치는 결정을 하고 상대가 나보다 약하면 싸워서 이기는 결정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선택하기보다 그동안 살아온 습관에 따라 성격으로 굳어지는 경향이 많다. 싸우던 사람은 위험해도 싸우고 도망가던 사람은 충분히 이길 수 있어도 도망간다. 이런 성격적 발달은 연인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도피 반응으로 발달된 사람은 갈등이 생기면 일단 숨고, 투쟁 반응이 발달된 사람은 당장 문제를 해결하려고 달려든다. 연인은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을 준비하지만,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 뇌와 몸은 상대를 “내 편”이 아니라 “위협”으로 감지한다. 그때부터 대화는 협상이 아니라 생존 반응이 된다. 서로에 대한 반응 유형을 이해하지 못하면 싸우게 된 원인 때문이 아니라 싸우는 과정에서의 생존 반응 떄문에 이별에 이르고 만다.
월터 캐논의 연구 이후 다미주신경 이론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방어반응을 단순한 투쟁과 도피만이 아니라, 논쟁, 전략, 얼음, 맞춤까지 포함해 6개의 갈등 반응으로 더 복합하게 발전했다. 이별로 가는 갈등의 여섯 가지 반응은 다음과 같다.
- 첫째, 폭발형 투쟁이다. 이것은 상대의 말, 표정, 침묵을 모욕이나 공격으로 해석하고 즉각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유형이다. 폭발형은 당장 그 현장에서는 신경계의 과도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폭발한 그 순간에는 과도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반응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위협적인 도발에 대한 방어적·보복적 반응이다. 이런 폭발 반응은 상대가 실제로 공격의 의도가 있었는지보다, 내가 공격받았다고 해석했는지가 중요하다. 폭발형은 대체로 자기의 문제를 인식한다. 폭발하는 도중에는 “내가 폭발한 이유는 너 때문”이라며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의 폭발에 대해 반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후회를 많이 하지만 그렇다고 폭발하는 습관을 고치기는 어렵다. 다르게 반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폭발형은 갈등에 불같이 대처하는 것처럼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즉시로 반응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폭발로 인해 장점들이 대부분 감춰지곤 한다.
- 둘째, 논쟁형 투쟁이다. 이 유형은 소리를 지르기보다 말과 논리로 싸운다. 처음에는 합리적인 토론처럼 보인다.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지난번에는 이렇게 말했잖아.” “그럼 정확히 네 입장이 뭔데?” 이런 방식으로 논리적 말싸움을 하기 때문에 폭발형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문제는 논쟁이 길어질수록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공격한다. 그래서 당하는 입장에서는 옴짝달싹 할 수가 없어서 숨이 막힐 수 있다. 의사소통 연구에서 ‘논쟁’을 상대의 주장과 근거를 다루는 것으로, ‘언어공격’은 상대의 자아개념과 인격을 공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별로 가는 커플은 자주 이 경계를 넘는다. “그 결정은 무리야”가 “너는 현실감각이 없어”가 되고, 결국 “너는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야”가 된다. 이렇듯 행동에 대한 말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격을 규정하는 말로 변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 존재를 부정하는 대화로 발전한다. 그러면 대화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상대의 정체성을 손상시키는 싸움이 된다.
- 셋째, 전략형 투쟁이다. 이 유형은 감정이 폭발하는 싸움이 아니라 계산된 싸움으로 이긴다. 상대의 말을 다음 공격의 재료로 삼기 위해 듣고, 나중에 얻을 이익을 위해 당장의 말싸움은 양보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다만, 결국에는 모든 정보들을 종합해서 이기고 만다. 이기기 위해 침착하기도 하고, 경청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심리학자 패터슨은 이런 성향을 ‘도구적 공격성’이라고 불렀다. 즉 공격을 분노의 부산물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관계에서는 이것이 협박, 침묵, 부모 동원, 돈 문제 압박, 일정 취소, 증거 수집, 주변 여론 만들기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전략형 투쟁은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고, 사과하고, 양보하게 만든다. 전략형은 스스로 싸움에 자신이 있다고 여기지만 장기적으로는 치명적이다. 상대는 “이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이런 식으로 통제당하겠구나”라고 느낀다.
- 4번째, 도피형이다. 도피형 반응은 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갈등을 키운다. 한쪽이 “오늘 이 얘기 끝내자”고 하면 도피형은 “지금은 피곤해”, “나중에 얘기하자”며 회피한다. 그러다 연락을 줄이고, 만남을 미룬다. 도피형에게 요구하는 사람은 상대가 회피한다고 느껴 더 강하게 추궁하고, 회피하는 사람은 더 위협을 느껴 더 물러난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요구하는 사람이 악역을 맡게 되지만 도피하는 패턴이 고정될 경우, 훈련된 상담사가 아니라면, 아무리 안정형이라고 해도 화가 나는 게 자연스럽다. 도피형이 종종 애착유형의 회피형과 헤깔리는데, 애착유형의 회피형은 갈등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관계 패턴에 대한 것이고 도피형은 갈등이 발생한 이후의 반응이다. 불안형이 평소 관계에서는 집착적으로 나오다가 그 집착이 싫어서 상대가 화내며 갈등이 생기면 도피하는 경우는 이별 커플들에게서 매우 많이 보이는 현상이다. 반대로 평소 관계에서는 자기 일을 집중하느라 관계에서는 회피하다가 상대가 ‘관심이 없냐’고 따지며 갈등이 생기면 화를 내며 투쟁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불안-회피의 애착유형과, 투쟁-도피의 갈등반응유형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 5번째, 얼음형이다. 얼음형은 갈등 앞에서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태다. 겉으로는 무관심, 무책임, 우유부단처럼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신경계가 과부하 상태이다. 실제 상담 사례에서 여자친구와 싸운 이후 3주 동안 연락을 단절했었는데, 여자친구가 싫거나 헤어질 생각을 했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얼음형을 만난 사람은 얼음형인 상대에게 “결정하지 않는 배신”감을 느낀다. 사실상 투쟁형 입장에서는 얼음형의 무반응이 더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얼음형의 경우에는 나이가 들었을 때 뇌졸중에 걸리는 사례가 많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갈등에 대한 반응은 신경계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각 갈등 반응 유형에 따른 건강도에 대한 연구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모든 유형 중에 건강에 가장 안 좋은 유형이 얼음 유형이다.
- 6번째, 맞춤형이다. 맞춤형은 갈등 상황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상대에게 맞추고 달래고 비위를 맞추는 반응이다. “알겠어, 네 말이 맞아.” “우리 집에는 내가 말할게.” “내가 다 맞출게.”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처음에는 성숙한 양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자기 욕구를 지우는 방식이라면 나중에 더 큰 반동이 온다. 계속 모든 것을 맞추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자”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는 배신감을 느끼지만, 당사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맞춤형은 다른 어떤 유형보다 더 극단적으로 보인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다 맞춰주며 사랑한다고 했는데 바로 오늘 헤어지자고 말하기도 한다. 맞춤형 입장에서는 더 싸울 힘도, 도망칠 힘도, 설득할 힘도 없어진 상태다. 외부에서 볼 때는 맞춤형을 위로하고 맞춤형이 희생했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상대 입장에서는 그동안 전혀 표현하지 않다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느끼고 대부분은 바람이 났다고 해석한다. 대부분의 갈등 상황에서 맞춤형은 사과하고 맞추지만, 속으로는 모욕감이 쌓여 있다. 그러다가 며칠 뒤 갑자기 이별을 통보한다.
싸움의 방식이 달라야 한다.
이별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연애하다 보면 싸워야 할 문제들이 있다. 단, 싸움의 방식이 달라야 한다. 첫째, 지금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와 내가 느끼는 위협이 무엇인지 구분해야 한다. “연락을 안했다”와 “이기적이다”는 다른 것이다. 연락을 안하는 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해도 사랑하지만 성격적인 문제일 수 있다. 둘째, 논쟁할 때는 상대의 사람됨이 아니라 주장과 선택지만 다뤄야 한다. “네가 고른 선물은 너무 비싸다”는 가능하지만 “너는 낭비가 심하다”는 파괴적이다. 셋째, 도피하는 사람에게는 즉답을 강요하기보다 대화 시간을 약속하게 해야 한다. “지금 말해”보다 “오늘 밤 9시에 30분에 이 주제로 이야기하자”가 낫다. 넷째, 맞추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괜찮다”는 말 대신 “어디까지는 가능하고 어디부터는 어렵다”를 말하게 해야 한다. 다섯째, 전략형의 경우, 조건적 압박을 멈춰야 한다. 이별, 부모 동원, 경제적 제재, 침묵 처벌을 협상 도구로 쓰기 시작하면 연애가 아니라 권력게임이 된다. 갈등을 만든 사건 자체는 이별의 원인이 아니다. 갈등을 위협으로 감지한 두 사람이 각자의 생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이별이 시작된다. 어떤 사람은 화내며 지키려 하고, 어떤 사람은 말로 이기려 하며, 어떤 사람은 계산적으로 압박하고, 어떤 사람은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얼어붙고, 어떤 사람은 맞추다가 무너진다. 행복한 연애를 위해 가장 중요한 준비는, 서로가 위협을 느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별을 막는 커플은 갈등이 없는 커플이 아니다. 갈등 속에서도 폭발, 논쟁, 전략, 도피, 얼음, 맞춤의 자동 반응을 멈추고 다시 대화로 돌아올 수 있는 커플이 결혼까지 가서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다.
- Cannon, W. B. (1915). Bodily changes in pain, hunger, fear and rage: An account of recent researches into the function of emotional excitement. D. Appleton and Company.
- Hample, D. (2008). Verbal aggressiveness. In W. Donsbach (Ed.), The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communication. Blackwell Publishing. https://doi.org/10.1002/9781405186407.wbiecv003
- Heavey, C. L., Christensen, A., & Malamuth, N. M. (1995). The longitudinal impact of demand and withdrawal during marital conflict.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63(5), 797–801. https://doi.org/10.1037/0022-006X.63.5.797
- Kozlowska, K., Walker, P., McLean, L., & Carrive, P. (2015). Fear and the defense cascade: Clinical implications and management. Harvard Review of Psychiatry, 23(4), 263–287. https://doi.org/10.1097/HRP.0000000000000065
- Porges, S. W. (2007). The polyvagal perspective. Biological Psychology, 74(2), 116–143. https://doi.org/10.1016/j.biopsycho.2006.06.009
- Raine, A., Dodge, K., Loeber, R., Gatzke-Kopp, L., Lynam, D., Reynolds, C., Stouthamer-Loeber, M., & Liu, J. (2006). The reactive–proactive aggression questionnaire: Differential correlates of reactive and proactive aggression in adolescent boys. Aggressive Behavior, 32(2), 159–171. https://doi.org/10.1002/ab.20115
- Schauer, M., & Elbert, T. (2010). Dissociation following traumatic stress: Etiology and treatment. Zeitschrift für Psychologie/Journal of Psychology, 218(2), 109–127. https://doi.org/10.1027/0044-3409/a000018
- Taylor, S. E., Klein, L. C., Lewis, B. P., Gruenewald, T. L., Gurung, R. A. R., & Updegraff, J. A. (2000). Biobehavioral responses to stress in females: Tend-and-befriend, not fight-or-flight. Psychological Review, 107(3), 411–429. https://doi.org/10.1037/0033-295X.107.3.411
